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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정치가 이산보
구분 역사인물
내용 충절(忠節)에 산 학자(學者)인정치가(政治家) 이산보(李山甫)

나라가 정치를 잘하느냐 잘못된 나라냐 하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였다.나라에서 아무리 강한 군대가 있고 성현군자가 정치를 한다해도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면 그 나라의 정치는 잘못된 정치라고 말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가난을 타고난 것이 아니다라고 딱잘라서 말하는 이산보(李山甫)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의 충신이다.

그는 중종(中宗) 34년(1539)에 보령(保寧)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거(中擧) 이고 호는 명곡(鳴谷)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그의 본관은 한산(韓山)으로서 선조(宣祖) 1년(1568)에 문과에 급제하고 해미현감(海美縣監) 정언(正言)등을 거쳐 북도(北道)의 어사로 나갔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집의(執義) 대사간을 거쳐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그는 높은 충성을 보이게 된다.

기축옥사는 전라도(全羅道)의 선비가 정권을 장악할 욕심으로 처음은 이율곡(李栗谷)문하에 출입하면서 명망이 높았는데 이율곡(李栗谷)이 죽자 동인편에붙어서 이율곡(李栗谷)을 욕하며 동인에 아부하여 어떻게든지 출세를 노렸었다. 그의 이와같은 행실을 알고 있는 선조(宣祖)께서는 그를 좋아하지 않자 수찬 벼슬까지 올랐던 그가 벼슬을 버리고 전주(全州)에 은거하면서 은근히 조정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황해도(黃海道)와 전라도(全羅道)에서 봉기하였으나 실패하고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숨었다가 자살한 사건인데 이때 이산보(李山甫)는 선비로서 하는 행실이 과격하며 변심이 많은 정여립(鄭汝立)의 탄핵을 주장하며 그의 모의를 사전에 수습하는데 앞장섰었다.

그 후 그는 대사헌에 올랐다가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경서와 사기를 읽으며 소일을 했었다. 그가 한유하게 소일을 하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졌다. 그는 곧장 조정으로 들어가선 나라의 일을 걱정하며 대책을 연구했으며 선조(宣祖)를 따라서 의주(義州)로 갔다 다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되었다.

우리나라의 국토가 왜구에게 짓밟혀서 백성의 원성이 드높았었다. 이산보(李山甫)는 구국의 일념에 모든 백성이 궐기하여 오라캐를 무찌를 것을 강조했었다. 마침내 명(明)나라에서 원군이 오게되어 차츰 올랑캐를 몰아붙일 때 그는 왕명으로 도검찰사가 되고 삼남으로 내려가선 군량이 떨어진 명(明)나라 군사들을 먹일 군량을 모으러 다녔다.

나라에 큰 난리가 있어서 어데가나 곡식이 쌓여있지가 않았다. 그는 동서로 뛰면서 우리나라를 도우러온 명(明)나라 군사를 먹일 군량수집에 온 정성을 다하여 위기를 넘기니 선조(宣祖)도 그의 부지런하고 강직함에 노랬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우리나라 백성들은 오랫동안 가진 고생을 하면서도 잘도 견뎌내서 오랑캐가 물러가고 이제는 백성들이 마음편하게 살게 되었을 때 였다. 이번에는 비 한방울 떨어지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잖아도 오랜 고생에 시달린 백성들이 가뭄에 시달리자 삶에 대한 매력도 잊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선조(宣祖)가 가뭄을 걱정한 나머지 가뭄이 가장 극심한 지방으로 이산보(李山甫)를 보내어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수습하라 했다.

그는 어명을 받고 시골로 내려갔으나 어데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않았다. 굶는 백성에게 밥을 주는 것처럼 더 도움이 있겠는가? 하고 곡식을 나누어 먹게 하면서 자기는 제대로 끼니도 먹지 못하니 그를 따라간 신하들이 걱정이었다. 하루 한끼니 밥도 제대로 먹지를 않았다. 그래서 따라간 문관들이 수저를 들지 못하면「배불리 먹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밥을 먹을래도 배가부르게 먹을수가 없네…」하곤 다시 가뭄이 심한고을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고을의 원들이 인사가 밥을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사람으로 태어날 때 가난을 짊어지고 태어났느냐?」그는 가난한 사람편에서서 한나라의 판서가 고락을 같이하니 쌀을 땅속에 파묻어 두었던 사람들도 곡식을 파내서 나누어 먹었다 한다. 가뭄을 이깁시다. 먹을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살자는 그의 신념에 백성들은 배고픔 속에서도 꾸준히 참고 일했다.

그래서 모두가 힘이 생기는데 그는 피로 때문에 쓰러져 병으로 죽었다.

한나라의 판서가 가뭄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모두가 애석해 했으며 그는 공신으로서 영의정 벼슬이 내려졌고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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